한세대학교
NewsPhoto newsColumnTravelEducationK-POPK-SPORTSTown market bulletinTown informations bulletinYellowpage
ID저장
login
join us
 
VIEWMONEYLIFERELIGION교육
 
최영태 김홍식 이윤낙 Sonie Lee 김영걸

이차봉의 한국문화 산책
 저 자 명  : 이차봉
 저자현직 : 엘림에듀(Elim Education Center)
 E-Mail: elimedu@gmail.com
 
[DALLAS] 이차봉 l 지구의 자전을 믿었던 조선 시대 사람들
 
등록일자 2014-10-31 10:10 listprint font size plusfont size minus
“큰 의심이 없는 자는 깨달음도 없다”
 
조선 후기 대표적인 실학자 중의 한 사람인 담헌(湛軒) 홍대용의 말이다. 그는 의심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적인 사고의 선구자였다. 성리학이 모든 학문의 중심에 있었고 유학을 숭상하던 시대에 실용적인 학문으로 그릇된 세상을 개혁하려 했던 것은 여느 실학자와 다름이 없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과학 사상을 배우고 전파하기 위해 애썼다는 점에서는 다른 실학자와 확연히 구별된다.

1731년(영조 7년)에 태어난 그는 35세가 되던 1765년 11월 중국으로 가는 동지사의 일행인 수행 군관으로 임명되었다.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고배를 마신 터라 머리도 식힐 겸 청의 선진 문물도 배울 겸 서장관으로 임명된 작은아버지 홍억의 수행관이라는 명목으로 사신 일행에 합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작은아버지를 수행하는 일보다 중국 학자들과 당시 북경에 와 있던 서양 선교사들을 만나는 일에 더 열심을 내었다. 이들을 통해 서양과 서양의 새로운 과학 사상에 대해 눈을 뜨게 된 홍대용은 조선으로 돌아 온 뒤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과학 사상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세운 과학 사상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이 지구가 스스로 돈다는 지전설이다. 이미 서양에서는 지전설이 널리 퍼져서 교회의 천동설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홍대용은 선교사들의 강력한 천동설 주장에도 불구하고 지전설을 옹호하며 우주 무한론을 주장했고 수학, 천문학 등에도 업적을 남겨 조선시대의 가장 뛰어난 과학 사상가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면 홍대용이 지구가 스스로 돈다고 주장한 최초의 한국인이었을까? 아니다. 홍대용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지전설을 주장한 한국인이 있었다. 바로 김석문(金錫文, 1658∼1735)이다. 그 역시 관직은 고작 군수에 그쳤지만 새로운 학문에 열심인 성리학자였다. 애초에 역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삼라만상의 형성과 변화의 이치를 깊이 이해하고 있던 그가 생각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된 것이 바로 1638년 선교사 로(James Roh)가 중국에서 간행한 『오위력지(五緯曆指)』라는 책이다.

이 책에는 프톨레미(K. Ptolemaeos)의 천동설과 브라헤(Tycho Brahe)의 지전설이 소개되어 있었는데 결론은 천동설이었다. 그러나 김석문은 자신이 성리학적 관점에서 이해한 역을 토대로 브라헤의 견해를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견해를 보완했다. 즉, 김석문은 자신이 쓴 『역학도해(易學圖解)』라는 책을 통해 여러 행성들이 태양의 주위를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돌뿐만 아니라 지구도 남북극을 축으로 하루에 한 번씩, 1년에 360번 자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선구적인 과학 사상은 널리 전파되지 못했다. 과학적인 관측을 통해 증명된 이론이 아니었을 뿐더러 이익, 홍대용 등 몇몇 실학자들의 호응을 얻었을 뿐 전혀 다른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가 돌든 하늘이 돌든 성리학을 최고의 학문으로 알고 있던 조선의 학자들에게 이러한 주장은 도무지 관심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지동설의 포기를 명령받았다(1616). 그래도 계속해서 주장을 굽히지 않자 다시 로마에 소환되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고 지동설을 포기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1633) 나서야 비로소 풀려나게 된다. 마지못해 서명을 하고 재판정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400년이 지난 최근에 와서야 교황청은 갈릴레이 문제에 대한 매듭을 짓는 한편 과학계와 종교계간의 관계 개선을 위해 갈릴레이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했다는 이유로 재판 받을 당시 감금됐던 장소 부근인 바티칸궁 정원에 그의 조각상을 세운다는 보도가 있었다.

‘군주가 아무리 바른 정치를 해도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성리학이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인간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은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어린 시절부터 성리학에 많은 의문을 가졌다. 성리학에 예는 있지만 농사를 짓는 법은 없었다. 그런 것은 농부들이 경험으로나 아는 잡학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성리학자들을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잡학은 버려야 하는 학문일까? 잡학이야말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가? 홍대용은 의문이 많았다. 그러나 아버지나 스승도 그의 의문에 대해서 확실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성리학이 최고의 학문이요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출세하는 것을 군자의 이상으로 삼던 시대에 이단아 취급을 받아가면서도 자연 과학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이러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호기심이 그의 탐구심을 발동시켜서 지동설(地動說)이 조선에 유입되기도 전에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할 수 있게 했고, 심지어는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도 예측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당시 조선의 분위기를 생각할 때 이러한 그의 통찰력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생명의 위협 앞에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굴복했지만 자신의 학문적 양심과 주장은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갈릴레이는 400년이 지나서야 종교적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올 수 없는 이유로 기초 과학 교육의 부실을 이야기하던 어느 기자의 글을 읽으면서 그나마 우리에게는 홍대용이나 김석문 같은 실학자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겨지는지 모르겠다.



[© WeepleWorld,Inc. & weeple.net,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운영 원칙
 (0 /300)
 
 
 
company notice customer center Weeple facebook Weeple twitter
 
Copyright 2012-2017. WeepleWorld, Inc. All rights reserved.